법률사무소 이화 장효강
혼인신고서 한 장.
그 얇고 하얀 종이 위에 두 사람이 이름을 쓰면 혼인이 완성된다고 믿는 세상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종이를 쓰지 않고도 오래도록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손을 잡고 잠들며, 서로의 숨결을 나눈다. 그들에게도 '혼(婚)'이란 글자가 허락될 수 있을까.
법률은 그런 이들을 ‘사실혼’이라 부른다.
‘사실’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무덤덤하고 냉정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단어 뒤에 붙은 '혼'이라는 글자만큼은 묘하게 따뜻하고 끈적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그 둘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을지 모른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사랑과 삶을 나누는 일.
혼인신고를 한 법률혼과는 달리, 사실혼 관계는 법의 눈에 완벽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어둑한 골목의 그림자처럼, 분명히 거기에 존재하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는 형태의 삶이다. 법률혼이 이혼의 합의와 신고라는 절차적 과정을 통해서만 관계의 끝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수 있다면, 사실혼은 그저 마음의 문 하나를 닫는 것으로도 끝날 수 있는 관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법은 그 그림자 같은 관계에도 빛을 비춘다. 사실혼 관계가 파탄 나면, 함께 쌓아올린 삶의 흔적들을 헤아려 재산을 나누고, 마음에 남은 상처를 위로하기 위한 위자료 청구권도 인정한다. 함께 산다는 것의 무게는 차별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히 무겁고 아프다는 것을 법은 알고 있는 듯하다.
법정에서는 이 그림자의 실체를 확인하려 분주해진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었는지, 서로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살핀다. 법은 말한다. 사실혼 관계가 성립하려면 두 사람 사이에 혼인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객관적으로 부부 공동의 삶이라는 실체가 존재해야 한다고. 하지만, 법정이 아무리 날카로운 눈으로 들여다본다 한들, 두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혼'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혼인 없는 혼의 문제는 비단 이성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동성 간의 사랑과 삶에도 같은 물음표가 던져진다. 법은 아직 그들을 명시적으로 품진 않았으나, 그들이 부부로서의 삶을 살아가다 헤어질 때에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이유가 없지는 않다. 사랑과 삶의 본질은 법의 해석을 뛰어넘는 곳에 있으므로.
사실혼 관계에서도, 법률혼과 마찬가지로 동거와 협조, 부양과 정조의 의무가 있다. 권리가 주어지는 만큼 의무도 있다는 것이 법의 논리다. 그러나 이 의무라는 말이, 두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어떤 무게로 다가갈지 법은 알지 못한다. 법은 그저 두 사람의 삶을 수치와 기간과 객관적 사실로 조각내어 분석할 뿐이다.
부산법원의 한 판결은 말한다. 사실혼이 깨진 원인이 상대방의 숨긴 질병 때문이라면, 숨김의 책임을 진 자가 상대방의 아픔을 금전으로라도 위로할 의무가 있다고. 또 다른 울산법원의 판결은 말한다.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일을 하고, 서로의 가족을 돌보며 경제적 삶을 엮어냈다면, 그들은 혼인의 의사를 가진 부부였다고.
법정의 말들은 차갑고 단호하지만, 그 이면엔 두 사람의 삶이 있다. 그 삶은 법의 언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 삶의 세계는 법의 언어보다 깊고 넓고, 때로는 더 고요하고 아프다.
혼(婚)이란 결국 무엇일까?
사랑이란 결국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가 법을 통해 답을 얻으려 하는 그 순간에도, 혼과 사랑의 본질은 법의 언어를 넘어 다른 곳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수많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아픔과 기쁨이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 우리 곁에 조용히 살아 숨 쉰다. 종이 한 장의 혼인신고서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이미 서로의 삶 속에서 혼(婚)을 이루었고, 살아 있었으며, 아프도록 진짜였다.
그것이면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법이란 그저 그 삶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니.
0. 법률사무소 이화 | 장효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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